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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과 동시에 북한군의 3대 주공 축선 중 하나인 의정부-서울 축선을 둘러싼 전투다. 당시 북한군은 개성-문산-파주-서울 축선, 의정부-서울 축선, 춘천 축선으로 서울 공략을 노렸다. 이 3개 축선 중 춘천 방면은 남한군 6사단의 선전과 춘천 방면의 북한군에는 전차가 부족해서 실패로 돌아간 반면, 개성-문산 방면은 남한군 1사단으로 인해 1일 정도 지체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의정부 방면은 쉽게 무너졌다. 북한군은 105 땅크여단으로 보강된 3사단 및 4사단이 주력이었고, 남한군은 남한군 7사단이 주력이었다. 그러나 T-34/85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전력은 7사단 이외에 2사단 및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추가 투입되어도 막지 못했다. 여담으로 미군은 2.36인치 바주카포로 T-34/85를 못잡은 것을 남한군의 훈련 부족 탓으로 돌렸지만,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TF가 2.36인치 바주카포로 전차 공격에 실패하고 패퇴하자 부랴부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3.5인치 슈퍼 바주카포를 투입하게 된다. 사실 미군의 북한군에 대한 판단착오는 이것뿐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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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과 동시에 북한군의 3대 주공 축선 중 하나인 의정부-서울 축선을 둘러싼 전투다. 당시 북한군은 개성-문산-파주-서울 축선, 의정부-서울 축선, 춘천 축선으로 서울 공략을 노렸다. 이 3개 축선 중 춘천 방면은 남한군 6사단의 선전과 춘천 방면의 북한군에는 전차가 부족해서 실패로 돌아간 반면, 개성-문산 방면은 남한군 1사단으로 인해 1일 정도 지체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의정부 방면은 쉽게 무너졌다. 북한군은 105 땅크여단으로 보강된 3사단 및 4사단이 주력이었고, 남한군은 남한군 7사단이 주력이었다. 그러나 T-34/85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전력은 7사단 이외에 2사단 및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추가 투입되어도 막지 못했다. 7사단은 38선에 위치한 방어선에서 밀려난 후 포천과 동두천 방면에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이것도 여의치 않아 의정부로 밀렸고, 다급해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2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병력을 투입했지만 역시 별 소득이 없었던 것이다. 6월 26일에 북한군은 의정부를 점령했고, 국군은 강북구 창동에 방어선을 펼쳤지만, 곧 이어진 미아리 전투에서도 패하여 결국 수도 서울을 3일만에 적에게 빼앗기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 당시 북한군 전차는 실제적인 전투력 또한 뛰어난 걸작 전차였지만, 전차의 능력보다는 전차를 처음 보는 국군 병사들 사이에 공포와 무기력감을 심어준 것이 더 큰 패인 요인이었다. 당시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화기는 2.36인치 바주카포와 57mm 대전차포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잉여 장비였다. 이 화기들은 북한군의 T-34/85 전차에는 이빨도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요령과 경험이 부족하여 가장 장갑이 두꺼운 정면을 공격했기도 했겠지만, 경험과 훈련이 부족한 지휘관 및 병사들이 처음 보는 전차에 대해 측면 공격을 시도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여담으로 미군은 2.36인치 바주카포로 T-34/85를 못잡은 것을 남한군의 훈련 부족 탓으로 돌렸지만,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TF가 2.36인치 바주카포로 전차 공격에 실패하고 패퇴하자 부랴부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3.5인치 슈퍼 바주카포를 투입하게 된다. 사실 미군의 북한군에 대한 판단착오는 이것뿐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