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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평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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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평왕은 주나라의 왕이였다. 주나라는 그 시기를 둘로 나누는데 주무왕이 주를 건설하고 견융의 침공으로 유왕이 살해되는 시기까지를 서주라고 부른다. 당시 신후(申侯)가 견융족(犬戎族))과 연합해 주를 공격하였다. 주나라 호경을 정벌하고, 여산 아래에서 유왕을 시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서주(西周) 시대 전설에 의하면, 주나라 평왕(平王)의 작은 아들이 태어날 때 손에‘무(武)’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을 무(武)씨로 바꾸었다. 이때 진나라 양공은 주나라 평왕을 낙양까지 호위하여 무사히 파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주나라 평왕(平王)은 도읍을 동쪽으로 옮겨 오랑캐의 핍박을 피하였다. 주나라 평왕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의 시대를 서주 시대라 하고, 도읍을 옮겨 동쪽으로 낙양을 수도로 삼았을 때 이후를 동주 시대라 한다. 여신은 평왕 11년, 즉 진문후 21년(기원전 760) 진문후에게 피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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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평왕은 주나라의 왕이였다. 주나라는 그 시기를 둘로 나누는데 주무왕이 주를 건설하고 견융의 침공으로 유왕이 살해되는 시기까지를 서주라고 부른다. 당시 신후(申侯)가 견융족(犬戎族))과 연합해 주를 공격하였다. 주나라 호경을 정벌하고, 여산 아래에서 유왕을 시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서주(西周) 시대 전설에 의하면, 주나라 평왕(平王)의 작은 아들이 태어날 때 손에‘무(武)’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을 무(武)씨로 바꾸었다. 이때 진나라 양공은 주나라 평왕을 낙양까지 호위하여 무사히 파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주나라 평왕(平王)은 도읍을 동쪽으로 옮겨 오랑캐의 핍박을 피하였다. 주나라 평왕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의 시대를 서주 시대라 하고, 도읍을 옮겨 동쪽으로 낙양을 수도로 삼았을 때 이후를 동주 시대라 한다. 여신은 평왕 11년, 즉 진문후 21년(기원전 760) 진문후에게 피살된다. 주나라 평왕(희의구) 42년(기원전 729년), 송선공이 죽자 그에게 최상의 봉호인 "선"을 내렸기 송선공이라 칭한다. 주환왕(周 桓王 , 기원전719- 697)은 주나라(周의) 14대왕 평왕(平王)의 손자로, 아버지가 인질(人質)로 가 있던 정(鄭)나라에서 아버지 평왕의 죽음도 보지 못함을 애통(哀痛)하게 여겼다. 이후에는 권력이 제후에게로 넘어가 춘추 시대가 개막되었다. 위열왕(威烈王) 이후부터 진(秦)나라 시황의 통일까지를 전국시대라 한다. 평왕(平王) 때에는 왕실이 쇠미해졌으므로 서리(黍離)의 시에는 망국의 비애가 담겨 있는 것이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제후들간의 이해 관계가 대립하여 내란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주나라는 유왕(幽王). 평왕(平王) 이후 차츰 쇠하여 난왕에 이르러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