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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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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大梁)은 전국시대 위나라 최후의 수도였다. 대량은 위나라 땅이다. 살펴보건대 위에는 소량이 있기 때문에 대량으로 그것을 구별함이다. 손빈은 한나라를 돕기위해 한단으로 출병하려는 전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韓나라를 도우고자 한다면 위나라의 급소를 찔러야 합니다. 그래서 위나라의 대량을 치는게 좋습니다. 대량이 위나라의 도읍은 아니지만 도읍 다음으로 큰 도시이고 전략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방연은 한나라의 정에서 위나라의 대량까지 2백여 리 사이에 수레는 달리고 사람은 뛰어, 힘에 수고로움이 없이 수월하게 대량에 도달하였다. 위나라의 대량을 공격하는 그 사이 진나라는 조나라의 상당에 진출해 있었다. 국력이 증강된 진나라는 위(魏)나라를 공략해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기 때문에 위나라 군주인 혜왕(惠王)은 수도 안읍(安邑:山西省 解縣)에 불안을 느껴 대량(大梁)으로 천도하였다. 중국 연표(年表)에 의하면 위나라가 안읍에서 대량으로 천도한 것이 기원전 340년이므로 울료가 활약한 시기는 그 이후 일정 기간일 것이다. 뒤에 서울을 대량으로 옮겨 양(梁)나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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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함양, 허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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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大梁)은 전국시대 위나라 최후의 수도였다. 대량은 위나라 땅이다. 살펴보건대 위에는 소량이 있기 때문에 대량으로 그것을 구별함이다. 손빈은 한나라를 돕기위해 한단으로 출병하려는 전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韓나라를 도우고자 한다면 위나라의 급소를 찔러야 합니다. 그래서 위나라의 대량을 치는게 좋습니다. 대량이 위나라의 도읍은 아니지만 도읍 다음으로 큰 도시이고 전략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방연은 한나라의 정에서 위나라의 대량까지 2백여 리 사이에 수레는 달리고 사람은 뛰어, 힘에 수고로움이 없이 수월하게 대량에 도달하였다. 위나라의 대량을 공격하는 그 사이 진나라는 조나라의 상당에 진출해 있었다. 국력이 증강된 진나라는 위(魏)나라를 공략해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기 때문에 위나라 군주인 혜왕(惠王)은 수도 안읍(安邑:山西省 解縣)에 불안을 느껴 대량(大梁)으로 천도하였다. 중국 연표(年表)에 의하면 위나라가 안읍에서 대량으로 천도한 것이 기원전 340년이므로 울료가 활약한 시기는 그 이후 일정 기간일 것이다. 뒤에 서울을 대량으로 옮겨 양(梁)나라로도 불렸다. 진나라는 효공 때 수도를 셴양[咸陽]으로 옮겨 셴양은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남았다. 위나라의 대량 천도와 진나라의 국력 증강은 열국(列國)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열국은 연합전선을 펴 진나라를 관중지방(關中)의 땅에 봉쇄해 두려는 소진(蘇秦)의 이른바 ‘합종책(合縱策)’을 안출하였다. 중산국이 조나라에 병탄되고 악의가 조나라 땅으로 흘러들어오자 그를 포섭키 위해서 접근하지만, 악의 일행은 위나라 대량땅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그의 위명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가신을 자처한다.